나는 지금 덕질 놀이 중이다.

너는 지금 덕질 놀이 중이다. 03

Ho-찡찡이 2025. 2. 26. 23:42


[ 나는 지금 덕질 놀이 중이다 No.03 ]

20대가 되어서도 장국영 님을 좋아하면서 개봉하는 영화를 보고 한국에 발매된 음반을 구입하여 음악을 들었다.
예전처럼 빠져 살지는 않지만 늘 옆에 있는 듯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장국영 님의 사망 기사를 접하고 설마 거짓말이겠지....
만우절.... 사실임을 알고 가슴이 뚝 떨어지는 서늘해짐.... 한 동안 멍하니 있었다.
이럴 수는 없는데.... 어떻게..... '슬프다'라는 감정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의 청소년 시절의 우상이었던, 나의 정서를 책임져 주었던 한 부분이 상실된 느낌인 것 같다.
장국영 님의 죽음으로 나의 청소년 시절의 한 부분 또한 죽음을 느낀 듯하다.
나의 상실된 마음은 서서히 치유되었지만 장국영 님은 이 세상에서 숨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이 슬프고 그의 재능이 아깝고 더 많은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크다.

영화 보기를 좋아해 혼자서 영화를 자주 보러 다녔다.
지금이야 혼밥이니 혼술이니 당연하지만 그때는 혼자 영화관에 가는 사람을 굉장히 이상하게 보는 시기라....

내가 처음으로 혼자서 본 영화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본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영화 잡지를 많이 보던 시기라 이 영화가 개봉할 때를 기다렸다.
일요일에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학교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지금 당장 그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종로로 갔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종로 3가 단성사 극장 옆에 작은 영화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상영 중인데 도착하니 마지막 회만 몇자리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할까 끝나고 나면 마지막 지하철을 타도 늦게 집에 도착하는데.....    
사춘기를 아주 심하게 치르던 때라 알 게 뭐야 하는 사이에 영화표가 내 손안에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극장 앞에 종로에 오면  자주 가던 메밀국숫집에서 판메밀을 먹었다. (정말 맛집이었는데 없어진 지는 꽤 됐다.)  
배를 채우고 종로 3가에서 종각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큰 레코드 매장이 지하에 있었는데 이름이.... 신나라 레코드였던 것 같은데.... 가끔 언니랑 LP를 사러 다니고 했다.
그곳에서 음악도 듣고 레코드도 구경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목적지 '종로 서적' 으로 향했다.
지금은 사라진 곳이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이가 들어도 친구들을 종로에서 만난다면 '종로서적 앞에서 만나'가 자동으로 나왔는데 말이다.
종로서적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책도 볼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고, 팬시용품들도 특이하고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우리 같은 학생들에게는 시간 보내기 좋은 곳이다.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기라 말이다.
지금 같으면 카페에서 핸드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저녁이 되어서야 극장으로 향했다.
혼자서 처음으로 영화관에 와서 인지 너무 떨렸다.
극장의 불이 꺼지고 나서야 온전히 나 혼자가 되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 시절의 나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몰입을 해서 영화를 보고 감동은 잠시... 이제서야 걱정이 밀려온다.
학교에 간다고 나간 애가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은 밤까지 종로에서 이러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집에서는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 부모가 된 지금 너무 죄송하다. )
어쨌든 사고는 쳤고 집에는 들어가야 하니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가출을 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갈 곳이 없다.
집에 도착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엄마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오셨다.
그리고 나는 무지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거실에 들어오니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계셨다.
어디 갔다 왔는지 무슨 일인지 물으셨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 했다. 할 말이 없어서 말이다.....
그렇게 방에 들어가 울면서 잠을 청했다.
내가 반항을 하고자 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영화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어제 엄마한테 맞아서인지 온 몸이 아팠다.
엄마도 너 맘대로 해봐라는 식으로 그냥 뒀다.
하지만 학교에서 전화가 왔을 때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주셨다.
오후가 되어 학교가 끝마칠 시간까지 나는 방에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멍 때리다가 책 좀 보다가 낮잠도 좀 자고 세상 편하게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밥은 굶었던 것 같다.
그것이 엄마에게 하는 작은 반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서 결석을 한 줄 아는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절친들이라 사실은 이렇다고 얘기하면서 기분이 좀 풀렸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의 첫 일탈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는 지금도 감동이 있는 영화이다.
내가 살아왔던 시기의 사회적 부당함도 느끼지 못하던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알게 해 주려던 선생님들이 계셨다.
이때가 한참 선생님들의 노조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중심으로 참교육을 실천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많은 선생님들이 해고되시고, 학교에서 학생들도 같이 시위를 하면서 대립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곳에 나와 나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 그 선생님들의 나이가 20대 중 후반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어린 아기들 같은데 말이다.
참 용감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 사회의 부당함을 직접 맞설 수 있는 용기가 말이다.
중학교 때부터 전교조 선생님들이 계시긴 했지만 우리 고2 때가 최고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2학년때는 체육선생님과 함께 문집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해고되셨는지 아니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뒤로 학교에서 뵐 수는 없었다.  - 문집은 반 아이들이 짧은 글이나 시, 그림, 퀴즈, 유머 등을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들어 나누어 갖는 작은 출판 활동이다.
과연 이것이 현 학교 시스템에 반하는 일인가 싶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말이다.  
이런 시기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는 바로 지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내가 혼자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유는 내가 보고자 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혼자 보러 다니곤 했다.
20대가 되면서 지금 홍대병이라고 불리는 불치병에 걸려 있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하지 않고 이상한 것에 꽂혀서 4차원이다 그 이상을 넘어서 5차원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이때쯤 소형 영화관이 생기고 예술영화라 일컫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유럽 영화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예술영화를 찾아보는 것을 좋아했다.
영화를 이해한다기보다는 그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맘에 들었다.
주제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실 그때 봤던 많은 영화들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세 가지의 색  - 블루가 개봉되었을 때 시각적인 효과가 나의 침울한 20대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때 한 친구가 같은 취향이라 같이 보러 다니다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취향이 무척 비슷하여 밤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영화, 책, 음악 취향까지 너무나 비슷해서 그 만남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영화를 같이 보고 토론하고 책을 추천해 주고 같이 음악을 들었다.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다.

그렇게 3년 정도 연애를 하고 이별을 고했다.